중학교, 고등학교 때에도 그리 많은 책을 읽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면서도 취미란을 채워야 하는 일이 있을 때면, 늘상 '독서'같은 걸로 채워넣었던 기억이 난다. 왜 그랬을까.. 습관이었을까?
어릴 땐 그래도 꽤 많이 읽는 축에 들었다. 내가 국민학교 다닐 적, 부모님들께서 으레 사주시는 100권 전집이 우리 집엔 두 번 들여졌다. 한 번은 고향에서 4학년이 되기 전에, 두 번째는 부산으로 이사간 후 동생이 중학교 들어가기 전에. 난 그래도 그 책들이랑 꽤 친하게 지냈다. 두자리 수의 해가 지나버린 지금도 몇 권은 기억에 남아있다.
'해저 2만리', '소공자', '비밀의 화원', '플란다스의 개', '레미제라블', '삼총사', '허클베리핀' 등등.. TV만화로도 나온 작품들이라 더 기억이 잘 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상상 속의 인물들은 티비 시리즈와는 또 다른 여운이 남는 듯 하다. 우습게도 위인전기는 하나도 생각이 안난다. 제목만 기억하는 건 생각나는 거라고 할 수 없으니까.
중,고등학교 시절에 읽은 책은 역시 소설이 주류를 이루었다. '깨비책방'이라는 동네 책방이 생기면서부터 그런 듯 하다. 가장 즐겨 읽었던 장르는 '로빈 쿡'의 의학소설. '열', '돌연변이', '코마' 등과 같은 소설은 기존에 읽어왔던 소설에 비해 전문성이 가미된 짜릿한 논리게임과도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중학교 졸업시즌에 접했던 책이 바로 그 유명한 '은하영웅전설'. 친구들이 보는 걸 돌려가며 빌려봤던 기억이 난다. 그 때 또 관심있게 봤던 한 권의 책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라는 책이었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졸업을 앞둔, 그래서 할 것이 없던 중3 시절, 교실에서 열심히 봤던 책. 무엇이 현실이고 가설이며 상상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가던 책이었다. 기억 나는 장면이라곤 목성의 대기 속에서 해파리 같은 것이 둥둥 떠 다니는 이미지 하나. 그나마 이 책에는 자그마한 우여곡절도 얽혀있다. 고향에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고속버스에 그만 놓고 내려버린 것. 결국 같은 책을 한 번 더 샀었는데, 이번에는 서울에 이사 오기 전, 어머니의 아시는 분이 빌려간 상태에서 돌려받지 못하고 서울에 이사와버리는 바람에 또 잃어버린 셈이 된 것. 뭐, 그러려니 한다.
앞서 얘기한 '은하영웅전설'이 반 전체에서 한참 돌아다닐 때, 누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은하영웅전설'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을 모태로 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서점에서 '파운데이션'을 찾았지만, 역시나 9편짜리 장편; 결국 보진 못했지만, 대신 영화 '아이, 로봇'의 원작인 아시모프의 '로봇'시리즈를 구입했다. 하지만 이 역시 6권의 장편. 그 중 1~4편만 구입했는지, 집에는 5,6권이 없다. 빌려줬는데 못받은 건지, 안 산건지 모르겠다;;
집에 전집으로 구입된 책이 또 있었는데, '삼국지(10권, 이문열 평역)'와 '베니스의 개성상인(3권)', '동의보감(3권)'이 그것이다. 이 땐 정말 신났던 것 같다. 특히 삼국지는 정말 관우와 장비의 죽음 때마다 책을 덮어버렸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삼국지' 게임 할 때만큼은 어떻게든 살려냈던 기억도 오롯하게 남아있다. 참, 여동생이 '헤븐(Heaven)' 시리즈를 구입했었는데, 왠지 손이 안 가서 생략.
그 후로 구입한 책들도 모두 내 책상 옆, 책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영 화 '쥬라기 공원'이 언론에 나오기도 전에 구입했던 '쥬라기 공원(전2권)', 후속작 '잃어버린 세계(전2권), 역시 나중에 영화화 되었던 '스피어(전2권)', 스피어의 저자 '마이클 크라이튼'의 또 다른 책, '안드로메다 스트레인', 이미 영화화 되었던 '늑대개(Jack London I 태성),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 (이계진 I 우석)' 등등..
소 설 이외의 책은 아마도 고등학생이 된 후 대학교 1학년 때까지였던 것 같다. '불가사의'한 일에 관심이 많았던 고등학교 때에 주로 구입한 책들 때문이다. '세계 불가사의 백과(콜린 윌슨/대먼 윌슨 I 하서출판사)', '한국 상공의 UFO(한국UFO연구협회 I 고려원)', 'UFO와 우주법칙(조지 아담스키 I 고려원)', '가상의 세계로 여행(팬더북)', '아인슈타인의 방(에드 레지스 I 하서출판사), '영혼의 블랙홀(라이얼 왓슨 I 인간사), 그리고 '세계 SF 걸작선(고려원 미디어)'.
특히 '영혼의 블랙홀'은 참고 문헌만 무려 300여건에 달하는 상당히 수준 있는 책이었다. '1부 육체, 2부 마음, 3부 영혼'의 3부로 되어 있고 그 안에는 총 아홉 개의 장과 하나의 결론으로 나뉘어 있다. 상당히 방대한 분야의 이야기인데, 책의 목차를 다시금 넘겨보니, 이 책을 읽던 당시의 느낌이 전해지는 것 같다. 저자 '라이얼 왓슨'은 죽음을 '질병'으로 정의하는 것에 대해 하나의 장(場)을 할애해서 이야기하는데 그 내용이 다소 생소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이런 저런 책을 보다가 대학에 진학한 후로는 무슨 책을 봤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읽은 시기가 좀 불분명하지만,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야베스의 기도', 사라예보의 안네 프랑크로 불리게 된 소녀, '즐라타의 일기', '진터골 이야기' 등...
1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한 나는 병장 시절 '무협, 판타지'에 입문하게 된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 것. 당시 내가 있던 부대에는 독서 열풍이 불었는데, 다름 아닌 '퇴마록'을 위시한 수많은 판타지 문학이 바로 그것이었다. 전역하고 나서는 당시 부산의 2대 서점 중 하나인 동보서적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물론, 부대 도서관에서도 열심히 봤지만..
'퇴마록', '드래곤 라자'와 그 후속작이었던 '퓨처워커', '데로드 앤 데블랑', '귀환병 이야기'와 그 후속작 '패리어드 이야기', '묵향' 등등.. 하나하나 기억이 다 나지는 않지만, 대부분 짧게는 4권에서 길게는 10여권, 아니 20권 이상의 다작들인데다가 읽어내린 종류 또한 얼마인지 셀 수도 없을 정도다. 대학 도서관에서 마음에 드는, 재미있는 소설을 발견했을 땐 아침 문 열자마자부터 저녁 문 닫을 때까지 줄창 앉아서 본 적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볼 때면 하루 종일 8권 전후 정도 보곤 했는데, 재밌는 건 나랑 같은 책을 나와 같이 하루 종일, 줄창 보는 사람도 있었다는 것. 내가 먼저 읽을 경우나, 내가 뒤에 읽더라도 앞 사람의 속도가 나보다 빠를 경우엔 별 문제가 없는데 그 반대의 경우엔 상당히 괴로웠더랬다. 이렇게 본 무협, 판타지 소설의 권수는 대략 수백권.. 보통 한 작품의 권 수가 10권 이상인 것으로 봐서 기백권, 2~300여권은 되지 않았을까..
그 여파는 지금까지 쭈욱 계속 되고 있다. 그 때 몸에 익어버린 대충 통독은 다른 장르의 책을 읽는 데에 많은 방해 요인이 되었다. 물론, 다른 종류의 책도 많이 보려고 노력했었다. 아마 이 때 '신앙서적'도 많이 봤었는데 참 아이러니 한 일이다. 군 전역 후부터 대학 졸업하던 해까지 읽었던 신앙서적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다윗 -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땅에 쓰신 글씨', '안녕하세요 성령님', '성령님의 기름부으심', '죄책감과 은혜' 등. 하지만, 이건 한 때로 그쳤던 것 같다.
어쨌거나 공대생이었던 나는 대학 3학년 때 잠시나마 인문사회분야의 책을 읽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됐다. 인문사회대학 사람들과 대화하다보면 내가 얼마나 좁은 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는가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에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되어 읽은 책이 바로 '오래된 미래 - 노르베리 호지', '스콧 니어링의 생애', '달라이 라마, 예수를 말하다' 등이었다.
그 후 3~4년이 흐른 지금까지는 정말 본 책이 없다. 아니, 앞서 얘기한 책 중에 몇 권이 아마 이 시기에 읽었던 책인 듯 하다. 확실한 건 이 기간동안 읽은 책은 10권 남짓 할 거라는 거다. 이 3~4년은 나에게 머리마저 굳게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요즘은 소설이 아닌 책은 한 자리에서 30분 이상 읽기가 힘들다. 이렇듯이 힘들지만, 확실히 계속 노력해야 할 필요가 절실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