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쓴 루피/나만의 30제

[02/30] 제2제. '나' 답다는 것.

하늘치 2007. 2. 27.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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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나를 '' 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케이블tv에서 영화 '매트릭스' 1편을 보는 도중에 든 생각은 '나는 무엇일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영화의 내용 중에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는 장면이 나온다. 고통이 따르는 진실을 볼 것인지, 아니면 그것에 다가서는 것을 포기하고 거짓된 세상에서의 삶을 택할 것인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게 핵심이었다. 영화 한 편을 보고서 뭔가를 깨달았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생각할 만한 실마리를 얻어다는 것이지..

영화가 개봉되었을 당시에 매트릭스 시리즈를 모두 보긴 했지만, 그 영화 이면에 숨겨진 또 다른 어떤 것-진실, 복음, 아니면 그냥 어떤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워낙 SF환타지를 좋아하기 때문에 보여지는 외양만으로도 나를 흥분시키는 영화였기 때문이었다.

'콘택트', '어비스', '쥬라기공원', '반지의 제왕'등과 같은 부류의 영화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상상력의 시각화때문이다. 그들은 상상력을 시각화하고, 나는 시각화된 것을 통해 만족의 극대화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시각화가 나의 상상력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예를 들면, '스피어'.. 정도? 물론, 스피어는 출연진도 좋고, 시각화도 좋지만, 책으로 읽었을 때 형성되었던 나의 세계와는 다르기도 했거니와 풍성함이 모자라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SF환타지 영화가 단지 시각화의 화려함과 그에 대한 만족, 그리고 약간의 남는 여운으로 마무리되는 것과는 달리, 매트릭스는 스토리도 그렇거니와 영화의 배경이 되는 그 어떤 것(알 듯 하면서도 모르겠다)이 있다. 어쩌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은 거겠지만..

워쇼스키 형제가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 오라클과 모피어스, 그리고 네오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들이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건간에, 나는 내 삶의 길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의 차이라는 것 역시 신앙 문제와 맞물려 있는 중요한 주제니까.

내 사고의 중추를 이루는 것은 '시민교양'의 그것과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도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지난 몇 년간 읽었던 책 중에서 영향을 받은 것도 있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적응하며 배운 것도 있다. 그것은 상대방의 일부를 보고서 그의 사람됨을 판단하고 그에 대해 반응하는 것은, 항상 그렇지는 않겠지만,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름 스스로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이 함정이었을 줄이야..

나의 그런 면이, 나만의 고유한 색깔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마냥 좋기만을 바라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색깔을 분명히 하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색깔의 이름이 무엇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실이 당황스럽다기보다, 밀려드는 무감각함이 더 당황스럽다면 지나친 반응일까?

어쨌든 지나치게 화사한 것도 그렇다고 우중충한 것도 싫어서 택한 것이 남색.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000066' 정도. (그나마 이름도 모르고 색깔만 비슷한;) 그 색깔에 맞는 삶은 또 어떤 것일까. 우유부단하기 보다는 매사에 명쾌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 물론, 충분히 신중한 결정일 것이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상호간 존중하는 것의 필요를 아는 사람. 비록 남을 돕는 일을 앞에 두고 있다 하더라도, 내가 해야 할 일과 그렇지 않은 일, 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 뭐, 그런걸까?

재미있는 것은 이런 생각 자체도 스스로는 편협한 생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선호가 불분명한, 모호한 삶을 살 수는 없는 법. 그것이 중용이라는 겉보기엔 좋은 허울을 가지고 있더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나 자신임을 인식하는 것. 그렇기에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삶. 그것이 나의 정체성을 결정지어 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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