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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는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봐야지'라는 생각으로, 당장은 늘 미뤄놓기만 했던 이야기를 끄집어 내어 보려고 한다.
그 주제는 '이중성'. 하나의 삶에서 둘 이상의 성향이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리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슬픈 현실이다.
■ 고등학생일 때, 교회에서 수련회나 엠티를 가면 가끔 하던 것이 '롤링 페이퍼'였다. 주로 장점과 단점을 적어주는 시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걸 할 때마다 내 종이에는 이런 말이 적혔다.
내가 맡은 일에 대해서는, 분명 철저하게 하려고 신중을 기하는 편이긴 했다. 그게 같이 일하는 친구나 동생들에겐 좀 피곤했나 보다. 그리고 이런 나의 성격은 대학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과 엠티를 가서도 친구녀석들이 술 마시고 널부러지면 나중에 치우는 건 나였다. 뭐, 엠티는 별로 가 본 적이 없으니 그것도 한두 번이었지만.. 교회에서 고등부 교사를 맡은 후에도 나는 내가 맡은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했다. 주보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예배에 필요한 ppt자료를 준비하는 것, 그리고 내가 맡은 반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 등.. 그리고 인정도 받았다. 당시 연말이면 각 부서별로 주어지는 모범교사패도 받았을 정도니까.
하지만, 저게 정말 내 모습이었을까? 지금 생각하기론 당시의 나는 그다지 부정하진 않았던 듯 하다. 그런 열심이 내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차지하는 하루하루 삶의 비중이 작지 않았으니까.
지금은..?
지금도 어딘가에 소속이 되어 있을 때는 나름 열심히 한다. 성실하다고 인정도 받는다. 그러나 집에만 들어오면, 아니 어느 곳에 있건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점점 나태해지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전혀 시간 관리도 하지 않고 하루를 인터넷과 영화와 소설 등, 온갖 잡다한 것으로 보내버린다.
크리스찬으로서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부분에서 가장 크게 실패하고 말았다. 자꾸만 관계성의 중요성을 뒤로한 채, 이 세상의 재미와 즐거움만을 탐닉하다보니 어느 샌가 내 삶의 모든 것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판단, 즉 나에 대한 평판과 내 진실된 삶 사이의 괴리감은 계속해서 커져만 갔고, 점점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갔다. 급기야 교회 공동체에서 다른 이들과 같이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3주에 걸쳐 사람들에게서 도망쳤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완전히 무디어져 선데이 크리스찬의 전형적인 모습마저도 내게는 부담스러웠다. 내면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나 자신의 이중성에 대한 실망감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부끄럽고 화도 나고 우울했다.
하지만, 나는 완벽하게 도망칠 수 없었다. 나는 결국 교회로 돌아가야 했고, 다행스럽게도 한 가족같은 작은 소모임과의 교제를 통해 마음을 추슬렀다. 사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절망적이다시피한 내 인생을 차마 포기할 수 없었던 기억이 있다. 그것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회개하려 노력했던 기억이 있다. 다윗과 요나단의 모습을 통해, 특히 성군이라 불리는 다윗의 여러가지 모습들을 보면서, 나는 어쩌면 스스로를 정당화하여 점점 죄에 대해 무뎌졌는지도 모르겠다.
■ 내 안의 이중성, 즉 사람들의 이목이 나를 주시할 때와 그렇지 않고 혼자 있을 때의 내 모습은 좀 오버해서; 거의 하늘과 땅 수준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타인이고, 나는 나다. 내가 살아가면서 스스로에게 일관되지 못하다면 결코 진실된 삶을 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같은 이중성을 깨트리고자 한다. 죄에 대한 감각의 무딤을 날카롭게 벼리고 성령님의 임재에 민감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굳이 성경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그 의미가 명백한 윤리적 권위마저 무너지는 것이 이 시대의 현실이다. 간통죄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여론조사결과가 절반을 훌쩍 넘어서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나만의 이중성이 아닌 이 시대, 우리 사회 전체가 이중성의 늪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내가 붙들어야 하는 것은 바로 말씀이다. 내가 기독교인, 크리스찬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성경의 내용은 이 시대에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리고 단면을 볼 것이 아니라 전체를 볼 일이기에 더욱 주의를 요한다.
내 안의 이중성은 또한 내 선택의 결과물이다.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가진 이중성의 덫을 깨트려야겠다.
그 주제는 '이중성'. 하나의 삶에서 둘 이상의 성향이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리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슬픈 현실이다.
■ 고등학생일 때, 교회에서 수련회나 엠티를 가면 가끔 하던 것이 '롤링 페이퍼'였다. 주로 장점과 단점을 적어주는 시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걸 할 때마다 내 종이에는 이런 말이 적혔다.
단점 : 무슨 일이든 너무 완벽하게 하려고 한다..
내가 맡은 일에 대해서는, 분명 철저하게 하려고 신중을 기하는 편이긴 했다. 그게 같이 일하는 친구나 동생들에겐 좀 피곤했나 보다. 그리고 이런 나의 성격은 대학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과 엠티를 가서도 친구녀석들이 술 마시고 널부러지면 나중에 치우는 건 나였다. 뭐, 엠티는 별로 가 본 적이 없으니 그것도 한두 번이었지만.. 교회에서 고등부 교사를 맡은 후에도 나는 내가 맡은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했다. 주보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예배에 필요한 ppt자료를 준비하는 것, 그리고 내가 맡은 반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 등.. 그리고 인정도 받았다. 당시 연말이면 각 부서별로 주어지는 모범교사패도 받았을 정도니까.
하지만, 저게 정말 내 모습이었을까? 지금 생각하기론 당시의 나는 그다지 부정하진 않았던 듯 하다. 그런 열심이 내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차지하는 하루하루 삶의 비중이 작지 않았으니까.
지금은..?
지금도 어딘가에 소속이 되어 있을 때는 나름 열심히 한다. 성실하다고 인정도 받는다. 그러나 집에만 들어오면, 아니 어느 곳에 있건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점점 나태해지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전혀 시간 관리도 하지 않고 하루를 인터넷과 영화와 소설 등, 온갖 잡다한 것으로 보내버린다.
크리스찬으로서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부분에서 가장 크게 실패하고 말았다. 자꾸만 관계성의 중요성을 뒤로한 채, 이 세상의 재미와 즐거움만을 탐닉하다보니 어느 샌가 내 삶의 모든 것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판단, 즉 나에 대한 평판과 내 진실된 삶 사이의 괴리감은 계속해서 커져만 갔고, 점점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갔다. 급기야 교회 공동체에서 다른 이들과 같이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3주에 걸쳐 사람들에게서 도망쳤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완전히 무디어져 선데이 크리스찬의 전형적인 모습마저도 내게는 부담스러웠다. 내면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나 자신의 이중성에 대한 실망감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부끄럽고 화도 나고 우울했다.
하지만, 나는 완벽하게 도망칠 수 없었다. 나는 결국 교회로 돌아가야 했고, 다행스럽게도 한 가족같은 작은 소모임과의 교제를 통해 마음을 추슬렀다. 사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절망적이다시피한 내 인생을 차마 포기할 수 없었던 기억이 있다. 그것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회개하려 노력했던 기억이 있다. 다윗과 요나단의 모습을 통해, 특히 성군이라 불리는 다윗의 여러가지 모습들을 보면서, 나는 어쩌면 스스로를 정당화하여 점점 죄에 대해 무뎌졌는지도 모르겠다.
■ 내 안의 이중성, 즉 사람들의 이목이 나를 주시할 때와 그렇지 않고 혼자 있을 때의 내 모습은 좀 오버해서; 거의 하늘과 땅 수준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타인이고, 나는 나다. 내가 살아가면서 스스로에게 일관되지 못하다면 결코 진실된 삶을 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같은 이중성을 깨트리고자 한다. 죄에 대한 감각의 무딤을 날카롭게 벼리고 성령님의 임재에 민감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굳이 성경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그 의미가 명백한 윤리적 권위마저 무너지는 것이 이 시대의 현실이다. 간통죄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여론조사결과가 절반을 훌쩍 넘어서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나만의 이중성이 아닌 이 시대, 우리 사회 전체가 이중성의 늪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내가 붙들어야 하는 것은 바로 말씀이다. 내가 기독교인, 크리스찬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성경의 내용은 이 시대에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리고 단면을 볼 것이 아니라 전체를 볼 일이기에 더욱 주의를 요한다.
내 안의 이중성은 또한 내 선택의 결과물이다.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가진 이중성의 덫을 깨트려야겠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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